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스크바 공방전 (문단 편집) == 서론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qWiqDtWywmI)]}}}|| ||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과 실제 전투 당시 모습[* 영상은 모스크바의 반격(Moscow Strikes Back)이라는 전투 당시 촬영된 소련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몇 안되는 모스크바 전투의 실상을 담은 영상 자료 중 하나로 제15회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 수상작이다.] ||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소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로 꼽힌다. [[아돌프 히틀러]]는 군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장악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더 나아가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소련이 붕괴될 것이라고도 여겼는데 똑같은 이유로 소련 또한 절대적으로 모스크바를 사수해야만 했다. 원래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모스크바 점령을 소련 침공 후 3-4달 이내로 계획하고 있었다. 실제로 개전 이후 [[독일 국방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은 소련군을 족족 분쇄하며 수십 만의 인명 피해를 가하고 수백만 명의 포로를 확보하는데에 성공했지만 동시에 소련군은 격렬한 저항을 통해 독일군의 피해를 지속적으로 누적시키며 서서히 진격을 느리게 만들고 있었다. 일단 독일군은 10월 중순 모스크바 서쪽 120 km 근방의 모자이스크 방위선까지 진격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도로와 온 토지를 진흙탕으로 만드는 [[라스푸티차]]로 인해 보급과 병력의 이동이 매우 힘들어져 정지하게 되었다.겨울이 되고 진흙탕이 전부 얼어붙자 다시 진군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번에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이 제대로된 동계 대비가 되어있지 않던[* 독일 측에서는 전쟁이 겨울까지 장기화 될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안정적인 동계 대비를 통해 이런 환경에 적응이 되어 있었다.[* 물론 소련 군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식과는 달리 소련 측 또한 동사로 인한 피해가 상당하긴 했다. 단지 동복 구비 등으로 독일 측에 비해 장비적으로 대비가 더 되어 있었다는 의미이다. 독일군은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속에서 여름 군복을 입고 다녀야 했다.] 12월 초, 독일군의 정찰 부대가[* 주력 부대는 한참 뒤에 있었으며 보급선은 그보다도 더 뒤에 있었다.] [[크렘린]]에서 서쪽으로 30 km 떨어진 곳까지 진출하여 쌍안경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이미 주력부대는 추위와 약화된 전력, 그리고 소련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더이상 전진을 할 수가 없었다. 12월 5일, 소련군은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사단들을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하여 독일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의 반격은 새해를 지나 1942년 1월까지 이어졌으며 독일군을 모스크바로부터 100km까지 후퇴시키는데에 성공했다. 이 전투를 통해 소련군은 개전 사상 처음으로 독일의 공세를 좌절시켜 수도를 지켜냈지만, 100만명을 넘는 참혹한 인명 손실이 그 대가로 따랐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일군이 1939년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로 패퇴한 전투로 독일군 역사상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독일군 장성의 상당수가 해임되었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국방군 총사령관직을 겸직하게 되는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